마침내 깨달음을 향하여 한 걸음
헤세의 여성들은 철새처럼 빠르게 이동하는 남성의 마음에 따라 너무도 쉽게 버려진다. 게다가 버려지는 순간 지극히 아름다운 '추억'으로 채색된다. 여성의 가슴에 든 피멍은 헤세의 주인공들에게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헤세 작품의 여성들은 너무 쉽게 사랑을 포기하고, 돌아오지 않는 남성을 기다리지도 않으며, 하룻밤의 인연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채색하는 데 익숙하다. 그것은 당대 여성들이 정말로 '쿨하게' 사랑의 아픔을 잊어버려서가 아니라, 헤세가 여성들의 마음에 남긴 상처의 결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헤세의 작품 중 '여주인공'이라 할 만한 캐릭터가 거의 없다는 점 역시 전형적인 남성 중심적 시선 때문은 아닐까. 헤세의 작중인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여성은 『데미안』의 에바 부인이나 『게르트루트』의 게르트루트 정도인데, 에바 부인은 '신비로운 이상형'으로, 게르트루트는 '속을 알 수 없는 비밀의 여인'으로 그려진다.
『싯다르타』의 카말라는 헤세의 여성 인물 중 그래도 꽤 적극적인 편에 속한다. 싯다르타는 당대 최고의 기생으로 알려진 카말라의 모습에 반해 먼저 다가가 구애를 펼친다. 그런데 이 접근을 순수한 사랑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고민다와 헤어져 생애 최초로 '완전한 혼자'가 된 싯다르타는 불현듯 속세의 삶이 그리워진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온기가 그립다. 그리고 세속의 삶에서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는 깨달음에 사로잡힌다.
그런 그가 저잣거리에서 가장 먼저 발견한 아름다운 여인이 바로 카말라였다. 거의 걸인이나 다름없는 형상을 한 싯다르타는 카말라의 집으로 찾아가 그녀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달라'고 부탁한다. 완전한 구애가 아니라 카말라를 '사랑의 스승'으로 삼고 싶어 했다. 싯다르타는 카말라라는 여인 자체를 알고 싶었다기보다는 인간이 그토록 집착하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카말라는 결코 녹록지 않다. 수많은 남성의 마음을 쥐락 펴락한 경험이 있는 이 불세출의 여인은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지혜를 갖춘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카말라도 싯다르타 같은 남성은 처음이다. 유명한 남자, 돈 많은 남자, 잘생긴 남자, 유혹의 귀재임을 자처하는 남자, 그렇게 다채로운 남성들을 경험해 보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남자는 처음 본 것이다. "저는 사색할 줄 압니다. 저는 기다릴 줄 압니다. 저는 단식할 줄을 압니다."
장안의 모든 남자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카말라는 이토록 괴상하고도 신비로운 남자에게 탐구욕을 느낀다. 그녀는 부와 명예, 선망과 동경, 아름다움과 매력, 그 모든 것을 가져보았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는 가져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강력한 캐릭터인 카말라조차 『싯다르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헤세의 싯다르타에게 카말라는 골드문트나 크눌프의 여인들처럼 '스쳐가는 인연'이었다.
하지만 카말라는 싯다르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다. 이미 '사랑의 기술'을 모두 터득한 싯다르타가 그녀를 떠나버린 뒤에, 싯다르타도 모르게 그의 아들을 낳는다. 당대 최고의 기생에게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것은 그녀의 인생 전체를 완전히 뒤바꿀 수밖에 없는 일생일대의 도전이자 고통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생의 극히 '일부'만이 필요하지만, 여성이 남성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녀 인생의 전부를 걸어야 한다는 딜레마. 그 안타까운 불균형이 내가 사랑하는 헤세의 소설에서도 어김없이 반복된다는 점이 가슴 아프다.
더욱 가슴 아픈 점은, 헤세의 시대보다 훨씬 여성의 사회 참여 기회가 확대된 오늘날에도 이 안타까운 불균형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헤세가 그린 사랑 이야기는 아름답지만, 헤세가 그린 여성들은 결코 아름답기만 하지 않다. 그녀들은 상처 입은 심장을,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영혼을 홀로 끌어안은 채 죽거나 사라지거나, 아니면 흔적도 없이 망각되어야 했다.